애국가 역사 [대한민국 국민 99%가 모르고 있는 진실]

애국가 역사에 관하여 알아보도록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초등학교 입학 혹은 그 이전에 애국가에 관해서 교육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애국가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지정한 애국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계셨나요? 사실상 대한민국 애국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한것이죠. 그렇다면 대체 왜? 어떤 이유에서 우리가 알고있던 애국가가 ‘정부의 애국가로 지정되지 않았던 것인지’ 그 역사를 살펴보면 좋을거 같습니다.


애국가 역사

정부에서 지정한 애국가는 없다.

  •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위 대한민국 헌법에 관련된 내용은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법령에서도 애국가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대체 어떠한 이유에서 정부에서 지정한 애국가가 없는것인지 그 배경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면 좋을거 같습니다.


애국가 (愛國歌)

애국가 역사

애국가는 대한민국의 국가입니다. 앞서 언급드린대로 현 정부에서 지정한 애국가는 아니지만 관습상 국가입니다. 이런 애국가는 언제 처음 우리에게 알려져있을까요? 이는 1942년 10월 29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가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흘러 2010년 국민의례 규정에서 국민의례시 애국가를 부르거나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행정안전부 국민의례 절차


애국가 작사 / 작곡

  • 작사가 : 미상
  • 작곡가 : 안익태

애국가 작곡가

애국가의 가사는 1900년 초기에 쓰여졌다고 알려져있으나, 그 자취를 들춰보면 조선 후기 개화기와 갑오개혁 직후까지 올라갑니다. 1896년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에 의해 그 유명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멜로디로 불린 작사 미상의 애국가가 최초의 애국가로 여겨집니다. 여기서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라는 가사가 지금의 애국가에서 (조선 ⇒ 대한)으로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애국가는 여기저기서 수십개가 쏟아져 나왔다고도 합니다.

최초의 애국가 가사 (협성회)

성자신손 오백 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수 고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산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

이천만 오직 한 마음 나라 사랑하여

사농공상 상하 없이 제 직분 다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


대한제국에 와서 대한제국 애국가로 공식 국가로 지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 애국가는 배재학당과 임시정부의 애국가와는 별개의 국가입니다. 이때 작곡은 올드 랭 사인으로 교과서에서 익히 들어본 ‘작별’이라는 제목으로 번안되어 실리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졸업식에서 부르는 노래이지요.

이렇게 스코틀랜드 가곡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로버트 번스 작사, 윌리엄 쉴드 작곡)에 맞춰 가사를 부르던 애국가는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 작곡가에 의해서 1935년 11월 사 장조로 된 새 가락을 작곡합니다.

1936년 The Korean Student Bulletin

1936년 10월 호에 애국가 악보 광고가 붙기도 하였습니다. 새 가락을 붙인 애국가의 악보가 1942년 뉴욕한인교회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임시정부가 1942년 10월 29일에 국가로 사용하였지만 이는 일부 사람들에 의했을 뿐 알려진 곡은 아니였습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있었기 때문이죠.  다만 1942년 8월 29일에 개국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애국가 1절을 매일 방송하였습니다. 

애국가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할 불편한 이야기


북한에서도 815 광복 이후 정부수립 전까지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애국가를 제창하였습니다. 아래의 영상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김일성이 부르는 애국가입니다.


애국가 작사가

애국가의 작사가는 미상입니다. 하지만 애국가 작사가에 대한 두가지의 설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윤치호라는 설과 또 다른 하나는 안창호라는 설이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미상이구요.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은 윤치호가 대한민국의 애국가 가사의 일부를 썼다고 주장했습니다. 윤치영의 주장에 의하면 가사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입니다. 최병헌은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열기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습니다.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이들이 만들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 전해집니다.

앞서 소개드린 협성회의 대한민국 최초의 애국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가사 중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를 안창호가 가사의 문제를 삼아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로 고쳤는데 이 부분은 안창호선생이 고쳤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주요한과 안태국의 사위 홍재형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는데 그 첫번째 근거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 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있는 애국가가 들어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습니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 <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애국가 역사
1945년 7월경 윤치호가 셋째 딸 윤문희에게 전해준 애국가 필사본

윤치호

그때의 일들을 어찌 지금에 와서 현 시점의 환경에서 판단할 수 있겠냐만은 그가 남긴 이야기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조선시대 왕족이 세습을 통해 썩어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이 내용을 보아야 한다.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의 노력으로 1881년 16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의 첫번째 공식적 동경 유학생이 되었다. 일본 체류 중에 일본이 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것을 보고 문명개화가 시대의 정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영어를 배우는 것을 두고 고민하던 중 김옥균이 비밀리에 그에게 일본어와 영어를 익혀두라고 충고하였으며, 일본 유학 중 여행을 하며 견문을 넓혀갔다. 동시에 낙후된 조국 조선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게 된 계기였다. 일본을 통해 신분 차별이 없고, 남녀 차별이 없는 미국과 유럽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신념으로 삼았습니다.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김씨, 조씨에 이어 민씨 척족 세력이 전권을 장악하고 부패와 전횡을 일삼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다고 했다.  아마도 이렇게 남긴 말과 그의 행적이 현 시점에서는 문제로 지적받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애국가 가사가 전달하는 의미

경희대 법무대학원 강효백 교수가 애국가에 대해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 서적 «애국가는 없다»에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해보겠습니다.

“무궁화 삼천리”

나는 그동안 애국가의 이 가사로 우리나라 강토를 막연히 삼천리로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은 개항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 영토를 동서 2천리, 남북 4천리로 표현해왔다. 삼천리는 유배형을 보낼 때 제일 멀리 보내는 것을 삼천리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개항을 한 후 주로 친일파에 의해 삼천리가 입에 오르내리더니, 친일파 윤치호가 ‘무궁화 삼천리’로 조선의 강토를 축소시킨 것이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먼저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에도 이런 산을 넣어야지 왜 서울의 작은 산, 남산인가? 그리고 ‘철갑’은 일본 사무라이의 상징이지, 우리의 전통 갑옷의 상징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소나무를 표현할 때 철갑을 두른 듯한 모양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는데, 굳이 애국가에 이를 넣을 필요가 있을까?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달은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야만 빛날 수 있는 위성이다. 국가라면 자체 발광하는 항성인 해나 별을 가사에 넣을 것이지 달과 같은 위성을 넣어야 되겠는가? 세계 모든 나라 국가에서 가사에 항성이 없이 위성만 나오는 국가는 우리나라 애국가가 유일하다고 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국가라면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웅혼한 기상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마르고 닳다니? 왜 이리 소극적이고 부정적인가?

“충성을 다하여~ 나라 사랑하세”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에 ‘민주’ 나아가 ‘자유’는 나오지 않고 ‘충성’만 나오는가? 왕조국가 때 작사된 가사의 ‘충성’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가?

애국가 역사

“애국가는 없다” 서적 열기

그리고 모든 국민이 부르는 국가라면 가사가 누구나 알기 쉽고 일상생활에 쓰이는 단어로 쓰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람서리’가 무엇인가?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바람소리’로 착각하고 있다. ‘바람서리’의 ‘서리’는 ‘수박서리’, ‘참외서리’처럼 떼를 지어 남의 과일이나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을 뜻하는 것으로, ‘바람서리’는 오직 애국가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그리고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도 이상하다. 바람서리가 불변한 것이 우리 기상이라니? 이는 이러한 바람서리에서조차 불변한 것이 우리 기상이라는 뜻이리라. 그러니 어법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공활’과 ‘화려강산’도 애국가에만 나오는 단어다. 특히 ‘화려’라는 말은 ‘사치’라는 부정적인 뜻이 담긴 말이다. 그리고 ‘공활(空豁)’이라는 단어는 승정원일기에 단 한 번, 중국 문헌에서도 단 두 번밖에 쓰이지 않은 죽은 단어임에 반하여, 일본에서는 지금껏 살아있는 단어라고 한다. 일기장에 다시 태어나면 일본인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쓴 윤치호이기에 이런 단어를 선택한 것일까?


애국가는 표절?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초대된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서울에서 받은 대우가 좋지 않다고 불평하고 음악제를 추진한 안익태를 상대로 비난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때 애국가의 가락이 도브리치 시의 시가인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와 많이 닮았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불가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부른다면, 한국인들은 일어날 것입니다” (If Bulgarian singers came to Korea and sang O Dobrujanski Krai, Korean audiences would stand up!)

애국가 역사

안익태는 애국가의 필요성을 깨닫고 필라델피아 유학시절 무려 40여 나라의 국가를 수집했습니다. 또한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을 모아 애국가 작곡을 위한 기초 자료로 삼았다고 전해져있습니다. 이때 기초 자료에는 불가리아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있었을까요?

16소절 중 12소절이 비슷하다고 하네요. 하지만 두 곡의 첫소절이 서로 비슷하지만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약박으로 시작하는데 비해 “애국가”는 강박으로 시작하며, 전체적으로 가락의 분위기는 매우 다릅니다.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


애국가의 저작권

애국가의 저작권은 안익태의 유족이 그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1992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신탁을 통해 저작권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2003년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프로축구단 경기에서 애국가를 무단으로 사용한 두 구단을 고소하여 이 시기 상당히 큰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애국가의 저작권을 국가에서 사들이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결국 2005년 3월 16일 안익태의 유족이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에 저작권을 기증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글을 마치며…

어릴적부터 아주 익숙하게 들어왔고 당연한 애국가이지만 국가에서 지정한 것도 아니며, 관습적으로 사용되어온 애국가. 하지만 애국가를 만든 작사가는 미상이며, 작곡가는 친일의 흔적이 만연합니다. 당시의 음악가들이 음악을 하기위해 친일적 성향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살아가는 방식에 손가락질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도 그 당시 살기위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애국가”는 적어도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국가를 위한 대표적인 곡이 되어야 하고, 만든 사람 또한 국가의 애국심이 있는 인물이어야 하지 않을가요? 적어도 친일 성향이 있었다면 배제되었어야 했습니다.

국가에서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애국가를 공식적으로 지정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박수를 보냅니다. 새로운 애국가를 만드는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될거 같지만 언젠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라면 빠르면 좋지 않을까요?

한켠에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글을 마치도록하겠습니다.

자녀가 있으시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이 글을 많이 읽으시고 바로잡힌 교육을 해주시기를….


애국가 가사 /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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