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사천 회장은 한국의 부동산 재벌 중 한명으로 이북 출신의 실향민 출신으로, 그의 이야기는 한국 경제사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현재 해성그룹의 회장인 단재완의 아버지로 87세의 나이로 2001년 8월 25일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하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동산 거물이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사천 회장, 한국 부동산 재벌 [단재완 회장의 아버지]
단사천 회장은 처음에 재봉틀 제조 사업을 시작하여 자금을 모았습니다. 그 후에는 기업 사채와 사업 홪ㅇ을 병행하여 한국제지, 계양전기, 한국팩키지, 해성디에서, 해성산업, 세하 등을 산하로 두게 되었습니다.
해성그룹의 창립자 단사천
- 출생 1914년 08월 16일
- 사망 2001년 08월 25일
- 황해도 서흥군 신막읍 신막리 288번지 출생
- 가난한 집안의 2남 1녀 중 장남
- 신막소학교 3학년 재학 중 부친을 여의게 됨
- 해주고등보통학교가 마지막 학력
- 19세에 ‘나홀로 월남’
- 23세에 ‘일만상회’ 재봉틀 조립회사 설립
- 1945년 전재산을 털어 ‘해성직물상회’ 설립
- 1950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채업 시작
- 1958년 국내 인쇄용지 회사 ‘한국제지’ 설립
- 1977년 ‘계양전기’ 설립
단사천 회장의 현금력
단사천 회장은 한 때 명동 사채업계를 주름잡았으며, 전성기에는 대한민국의 재벌 회장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현금 부자로 알려졌습니다. 그의 현금력은 엄청났으며, 사채를 통해 기업들에게 자금을 대여하면서 부동산, 공장, 토지 등을 담보로 잡기도 했습니다. 단사천 회장의 1970년대 자금력은 현금 60억원을 보유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은행 등 금융시장의 자금조달 능력이 기업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경제개발 시기, 단 회장은 현금이 부족한 기업에게 은행을 대신하여 현금을 융통시켜 준 인물입니다.
정주영(현대그룹 설립자), 이병철(삼성그룹 설립자)도 손 벌렸던 ‘현금왕’
중공업, 자동차와 건설업 등 대규모 사업을 펼쳤던 정주영 회장은 사업 추진 과정에서 돈이 부족한 경우가 잦았습니다. 매달 직원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날처럼 큰돈이 필요할 때가 되면 은행에서 돈을 다 빌리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합니다. 이때마다 정 회장에게 현금을 빌려주며 급한 불을 자주 꺼줬던 인물이 단사천 회장이라고 합니다.
삼성그룹을 일궜던 이병철 회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여러 재계 총수들도 사업을 확장하다 가끔 돈줄이 막힐 때면 단 회장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때문에 과거 단 회장을 둘러싸고 재계와 명동 사채시장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재벌 몇 정도는 금방 날려버릴 수 있다’, ‘그가 부르면 기업 총수들도 두말하지 않고 달려온다’는 식의 소문들이 무성했다고 하네요.
단사천 회장과 1960년대의 사채시장 현황
현재의 사채시장과 과거의 사채시장은 분위기부터 달랐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거 같습니다. 현재의 사채시장이라하면 문신을 온몸에 두르고 건달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과거의 사채시장은 기업과 상생했다고 할까요. 설명을 남기겠습니다.
1. 사채시장과 1960년대의 경제 환경
한국의 경제 환경은 1960년대에는 여러 어려움과 불확실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한국 경제는 민간 부문의 자금이 부족하고, 외부 자금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에 기업들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사채시장이었습니다.
2. 사채시장의 특징과 규모
사채시장은 당시에는 기업들이 자금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1972년에는 사채시장의 규모가 3500억원에 달해 기업 자금의 30% 정도가 사채시장에서 조달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거대한 자금 시장이었습니다.
3. 단사천 회장과 사채시장
단사천 회장은 사채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개성방’이라는 그룹을 이끌었고, 이를 통해 사채시장에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단사천 회장과 개성방 그룹은 현금 60억원을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개성상인 정체성과 연관된 부분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4. 정부의 8·3 조치와 사채시장의 변화
사채시장이 거대한 규모를 갖고 있었던 동안, 정부는 이를 양성화하고 탈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72년 8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8·3 조치’를 통해 모든 기업사채를 동결시켰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기업들은 높은 이자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은행과 주식시장으로 자금 흐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5. 단사천 회장의 사채시장 활동 종료
단사천 회장이 사채시장에서 활동을 중단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8·3 조치의 영향과 개인적인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이 글에서는 최창학 등의 다른 사채권자들이 더 많은 자금을 사채시장을 통해 빌려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1960년대의 사채시장과 단사천 회장의 역할, 정부의 대응, 그리고 사채시장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통해 단사천 회장의 업적과 한국 경제의 특별한 시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금왕의 실패
단사천 회장에게도 실패는 존재했습니다. 1953년 설립했던 한국모방은 당시 섬유 수출이 활기를 띄며 순항하는가 싶었으나 재투자에 실패하면서 제일모직, 경남모직 등 경쟁업체들에게 밀리며 1970년에 폐업하게 됩니다.
사금융 양성화를 목적으로 출범한 단자회사(종합금융사) 설립에서도 재미를 보지 못합니다. 단사천 회장은 1982년 단자회사 설립이 자유화되자, 같은 이북출신 기업인 세창물산 김종호 회장, 타워호텔 남상옥 회장과 손잡고 신한투자금융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공동 설립자 간의 경영 분쟁과 정부의 경영 개입 등으로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하며 결국 지분을 털고 사업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한국의 부동산 재벌
부동산에서 만큼은 실패란 없었습니다. 서울 강남의 강남역과 삼성역을 가로지르는 테헤란로의 해성빌딩 2개 동과 서초동 송남빌딩, 중구 북창동의 해남빌딩, 성수동 우영테크노센터, 부산 송남빌딩 등 현재 해성그룹의 주요 자산들은 대부분 단사천 회장이 일궈낸 작품입니다. 1970년대 서울시에 기부한 강동구 명일동의 땅 1만 2,000여평까지 합치면 그가 남긴 부동산 자산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규모가 되었을 겁니다.
단사천 회장이 세상에 남기고 간 기업들
한국제지: 백상지의 첫 생산
한국제지는 국내 최초로 백상지를 생산하기 시작한 기업으로, 백상지를 홍콩에 수출한 최초의 국내 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이후 아트지 등 다양한 종류의 종이를 생산하며 국내 종이 산업을 선도하였습니다.
계양전기: 전동공구 제조업체
계양전기는 1977년에 설립된 전동공구 제조 전문 업체로, 전동공구와 자동차 전장품을 주력 제품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의 창업 이야기 역시 흥미로운데, 황해도 해주 출신인 단사천 회장이 18세 때 서울로 내려와 일만상회라는 재봉틀 조립회사를 세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한국팩키지: 우유팩 제조업체
한국팩키지는 우유팩 제조업체로, 우유 패키지에 그 이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한국제지에서 분사하여 설립되었으며, 1999년에는 코스닥에 상장하였습니다.
해성디에스: 차량용 반도체 기판 생산
해성디에스는 차량용 반도체 기판(리드프레임)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2014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이전에는 (舊)삼성테크윈 사업부였으며, 경남 창원시에 본사와 공장을 두고 있습니다.
세하: 백판지 제조업체
세하는 백판지 제조업체로, 2020년에 한국제지에 인수되었습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에 본사와 공장을 두고 있습니다.
단재완 회장
단사천의 1남 8녀의 자식들 중 유일한 아들이 단재완 회장입니다. 계양전기, 한국제지, 한국패키지 3개의 계열사를 가지고 있는 해성그룹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단재완 회장의 대표 부동산은 포스코사거리 랜드마크인 삼성동 해성 1빌딩과 해성 2빌딩입니다. 두 빌딩의 가치는 1조가 넘어섰습니다. 2021년 기준 건물 대지에 대한 추정 종부세만 약 87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를 비롯해 서초동, 성수동, 북창동, 부산에 이르기까지 단재완 회장이 직간접적으로 보유한 빌딩은 총 8채에 달합니다. 이 빌딩의 총 가치는 1조 후반에서 2조원에 달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이정도의 규모는 제가 가치분석할 수준을 뛰어넘어 잠자코 있겠습니다 후훗~
단사천이 2001년 세상을 떠나며 모든 재산은 고스란히 외아들 단재완 회장이 물려 받았습니다. 2014년 각기 흩어져있던 한국제지, 계양전기, 한국팩키지, 해성디에스, 해성산업 등을 계열사로 하는 해성그룹을 출범했습니다.
해성그룹 지분율
단재완 회장 인물 구조도
이후에는 단재완 회장의 내용이 주를 이루는듯하여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까지 단사천 회장의 일대기에 관해서 작성해보았습니다. 유익하셨다면 좋아요 구독 알림설정은 없습니다. 아래에 함께보면 재미난 글을 링크 남겨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